칠갑산 단풍과 청국장, 손두부.
답사기 작성일 : 2014년 8월
질풍노도를 곱씹는 소슬한 가을, 여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을 거닐어 보자
매번 이 시기가 되면 꽁꽁 숨어있던 부끄러운 고백들이 살그머니 삐져나온다. 저 이파리들이 괜스레 쑥스러운 듯 먼저 붉히고 있어서일까. 누구에게 이해 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는 감상에 젖으며 우리는 가을을 탄다.
뜨겁게 핏빛으로 달아오르며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단풍은 산길에 우아한 레드 카펫을 만들었다. 이런 길을 걷고 있자면 특별한 인연을 만나게 될 것만 같은 설렘이 생긴다. 가을길은 만남을 기대하고 과거의 사라진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더욱 진하게 각인시킨다.
낙엽을 집어 던지며 이별했던 경험은 없지만 괜스레 상처를 주고받았던, 언제적 얘기일지도 모를 사람들이 떠올라 씁쓸하면서도 조금은 부끄럽다. 한티고개는 고불고불 한없이 어린 기억을 조금씩 계속해서 흘러 넘치게 한다.
같은 배추로 김장을 하더라도 집집마다 익어가는 맛과 향이 다르듯 산속의 가을도 단풍이 무르익는 빛깔과 냄새가 다르다. 산마다 각각의 시간과 사연을 갖고 있을 텐데 칠갑산의 한티고개는 슬픈 시대와 삶의 한이 어려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숲의 바람은 더 차고 처량하게 느껴진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주 어릴 적부터 콩밭 매는 아낙네의 노래를 알고 있었다.
처연한 슬픔의 노래로 인해 자연스럽게 칠갑산의 분위기는 밝지 않게 각인되었다. 추울수록 잎을 벗어버리는 파리한 나뭇가지는 그 애달픔을 더하게 한다.
‘한티’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중요한 교통로이지만 험준하여 겨울철에는 단절되는 경우도 빈번하다는데 그래서인지 날이 추워질수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가을빛의 나무와 그것을 즐기는 사람. 바스락, 파사삭 마른 낙엽들의 밟히는 소리는 바삭한 김을 씹을 때의 질감 같기도 하고, 고소한 감자칩의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가을은 여려지는 감수성만큼이나 입맛도 풍성하게 좋아지는 계절이다. 고개의 휴게소에는 몸과 마음을 푸근하게 채워줄 따뜻한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다.
새벽 공기가 쌀쌀해지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 먹고 싶었던 음식이 있다. 칼칼하고 구수한 청국장과 든든한 손두부이다.
해가 지날수록 빵이나 과자보다는 김치에 밥, 주스보다는 커피나 술을 찾아가지만, 어릴 때부터 청국장을 특별했다.
일교차가 심한 가을에 감기가 잦았던 나는 입맛이 없을 때에도 엄마가 청국장을 자작하게 끓여주시면 여지없이 밥 한 그릇은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된장국도 아니고 김치찌개도 아닌 것이 참 특이하면서도 목과 배, 얼굴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청국장은 된장과 달리 단 며칠 만에 속성으로 만들 수 있어 전쟁 중에 먹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빨리 만들 수 있는데다 소화가 잘 되는 발효식품으로 발암물질을 감소시키고 유해물질을 흡착하여 몸 밖으로 배설시키는 건강한 음식이다.
드디어 한티고개의 유명한 청국장과 손두부가 나왔다. 뜨끈하고 구수한 청국장의 향은 더욱 허기지게 만든다. 하얀 쌀밥에 청국장의 콩과 두부건더기를 넉넉히 올려 자박하게 비벼 한입에 넣으니 진한 향과 맛이 따끈하게 온몸으로 퍼진다.
새하얀 손두부 또한 양념장에 찍어 먹거나 볶은 김치에 싸서 식사에 곁들이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칠갑산의 콩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청국장과 두부는 특별한 맛이 난다. 콩밭 매는 아낙네의 설움 같은 지리적 분위기가 함께 해서 그런지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깊은 구수함은 아렸던 마음을 다독인다.
한티고개에는 최익현 동상과 충혼탑, 그리고 칠갑천문대가 있다. 항일운동을 하다 잡혀 옥고를 치르고 일본인들이 주는 건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겠다며 식음을 전폐하다 숨을 거둔 최익현 장군의 얼이 기려져 있다. 푸른 산을 등지고 후손들을 지켜보고 있는 장군이 어딘지 슬퍼 보인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칠갑산 천문대는 가을 하늘 아래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밤하늘은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알려주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별을 그리워하는 걸까. 저물어 가는 가을산과 별은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의 구절이 생각나게 한다.
먹먹한 가을로의 여행은 녹지 못하고 쌓여가는 낙엽만큼 매년 가을, 가을에 겹쳐지며 오랫동안 마음에 쌓여 있을 것이다.